성곽 및 옹성

유적위치 보기
위치 :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 715-1사
시대 :
조선시대
종류 :
단묘(壇廟)
내용

성안 청량산 꼭대기의 수어장대 담 밖(서쪽)에 있는 당집이다. 이 당집은 남한산성의 동남쪽 축성책임자였던 이회가 모함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수어장대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는데, 뒤에 그의 억울함을 알고 그 혼백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곳에 건립한 것이다. 이곳에는 또 남한산성 수축당시 8도 도총섭으로서 서북성을 쌓았던 벽암대사 각성과 이 회의 부인의 영정도 모셔져 있다. 청량당은 ‘청계당’이라고도 하는데 벽암대사 김각성 스님도 함께 모시고 있기 때문이며, 매당, 응당이라는 이름은 수어장대에 있는 매바위전설로 인하여 청량당에 모신 이회의 혼령을 매당왕신, 응당왕신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또 ‘청량당’이라는 이름은 서장대가 서 있는 산이 곧 청량산이므로 산명을 당집이름으로 부른 것이며 ‘청량’은 ‘맑고 서늘한 기운’을 뜻한다. 인조2년(1624) 남한산성 수축 당시 서북성은 8도 도총섭으로 승군을 지휘한 벽암대사 김각성이 맡았고, 동남성은 총책임자인 이서의 부장 이회가 맡아서 쌓았다. 그러나 서북성은 기일내에 축성이 완료되었으나 이회가 맡은 구역은 성이 완성되지 못하였고 “이회는 축성경비를 주색잡기에 탕진하였다”는 등의 모함이 있었다. 이에 따라 이회는 군령에 의하여 서장대에서 즉결처분으로 참수되었다. 이때 이회의 처 송씨는 남편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으로 축성금을 구하러 갔다가 쌀을 싣고 한강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부인은 통곡하다가 한강 물에 투신자살하였다고 한다. 이회를 처형한 후 그가 쌓은 성벽을 조사해 보니 성이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었으며, 다만 산세가 워낙 험하므로 성벽 기초공사 등으로 기일이 지연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기에 당우를 세우고 그의 영혼을 위로한 것이라고 한다. 전설에는 형장에 선 이회가 말하기를 “내가 죽는 순간 한 마리의 매가 날아 올 것이니, 매가 오지 않으면 내 죄는 죽어 마땅하되 매가 날아오면 내가 무죄인줄 알라”하였다. 과연 그가 처형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날아와서 이회의 죽음을 바라보았다고 하며, 그 바위를 매바위라 하는데, 수어장대 모퉁이에 서 있다. 이곳의 이회, 벽암대사, 그리고 이회의 처 송씨와 후실 유씨의 초상화는 한국전쟁 때 없어진 것을 다시 봉안한 것이다. 한편 이곳 청량당에 벽암대사를 함께 모시는 까닭은, 그가 이회와 함께 남한산성을 나누어 축조하였고, 또 병자호란이 발발하였을 때는 승군을 이끌고 용전분투 하였으며, 결국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성하의 맹세’를 맺은 것을 보고 표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으므로, 이를 애석하게 여기고 청량당에 그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그전에 매년 음력 정월 초이튿날이면 인근의 만신들이 며칠 전부터 목욕재계한 후 이곳에서 정성껏 치성을 올렸다고 한다. 그것은 충성스럽고 정직한 이회와 그 부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것으로서 정월 초 2일은 부인 송씨가 한강의 쌀섬여울에서 투신한 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당은 2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당건물은 정면3칸, 측면1칸의 홑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건물의 가구는 굴도리식이며 주심포양식의 기둥을 하고 잇다. 본당의 중앙에는 4쪽 여닫이 격자문을 달고 좌우측칸에는 높이 175cm에 정면과 측면에 창문을 각각 내었다. 청량당 대분은 정면3칸, 측면1칸의 홑처마를 두른 맛배지붕 건물인데 좌우측의 칸은 각각 격자문을 달아 방으로 꾸몄고 출입문 중앙은 2쪽 여닫이 대문을 달고 문 위에는 홍살을 장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