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지

남한산성은 수목이 울창하며 지하수가 풍부하여 성내의 어느 곳을 파더라도 샘이 솟으며 옛부터 약수터가 많기로 유명하다. 남한산성 내의 수원에 대하여 『世宗實錄地理志』(1454)에서는 ‘성내에 우물이 7개가 있는데 가뭄을 만나도 줄지 아니한다’ 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1530)과 『東國輿地志』(1656)에서는 ‘안에 여섯 우물과 시내가 있다’고 하였다. 이 기록들은 모두 남한산성의 수축되기 전의 기록으로서 당시까지만 해도 성내의 우물의 수는 6-7개 정도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지만 『輿地圖書』(1760)에는 우물의 수가 21개로 늘어나며, 『大東地志』(1864)에는 우물이 80개이고 못이 45개로 그 수가 급격히 늘었다. 이것은 산성거민 확보 정책에 따라 산성 내의 주민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물이 부족하게 되자 계속 샘을 팠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장기간의 농성을 필요로 하는 산성은 튼튼한 성곽과 함께 풍부한 수원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선결 과제였다. 조선시대의 각종 지지자료를 보면 산성을 언급함에 있어서 대부분 성곽의 둘레와 성내에 있는 우물의 숫자를 기록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산성 내의 수원의 중요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이번 정밀 지표조사 기간 중 조사된 우물터는 대소 20여개가 훨씬 넘는다. 그러나 이 모두가 옛 부터 전해오는 것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우물에 대한 축조시기의 구별은 어렵기 때문에 구전에 의존하였으며 우물의 외관으로 판단하였다. 그 중 현재 옛 우물터로 추정되는 곳은 몇군데 되지 않으며, 대부분이 오랜 세월을 흐르는 동안 파괴되었거나 원형을 잃고 시멘트로 수리되어 있었고 사용하지 않는 곳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