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지도 영통사 왕건릉 만월대 성균관 공민왕릉 남대문 선죽교 조사지역

개성인근 주요유적

영통사
영통사 전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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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1027년(현종 18) 창건되었으며, 고려 왕실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어서 인종을 비롯한 여러 왕들이 자주 행차하여 분향하였으며, 인연이 있는 왕들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진영각(眞影閣)이 있었다. 고려 제11대 문종의 넷째 왕자였던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이곳에서 천태종을 개창하였으며, 입적한 후에는 그의 비가 이곳에 건립되었다. 16세기 무렵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전해져왔으나, 2002년 11월 북한의 조선경제협력위원회와 대한불교천태종이 함께 복원 사업을 시작하여 2005년 10월 31일 낙성식을 봉행하였다.

문화재로는 북한의 보물급문화재 제36호인 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 제37호인 영통사당간지주, 제35호인 영통사동삼층석탑, 제38호인 영통사서삼층석탑, 국보급문화재 제37호인 영통사오층탑이 있다.

왕건릉
왕건릉 전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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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적 제53호이며, 개성시 중심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송악산 기슭에 있다.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왕건과 신혜왕후 유씨가 함께 묻혀 있다. 원래 이름은 현릉이며 왕건릉이라고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현릉은 송악산 서쪽 파지동의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릉은 3번이나 묘를 옮긴 적이 있어 현재의 위치가 파지동인지 확인하기 어렵고 그 위치나 태조의 능이라는 상징성으로 볼 때 비록 전란 때문에 묘를 옮겼다 하더라도 다시 본래 위치로 돌아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는 것이 정설이다.

3단으로 축조된 웅장한 무덤과 왕건의 초상, 후삼국통일 시기의 문인 및 무인 석상이 서 있다. 무덤의 방위는 약간 서쪽으로 틀어진 남향이고 무덤 안은 석실구조를 하고 있다. 무덤 안의 동쪽 벽에는 왕대와 매화·청룡이 그려져 있고, 서쪽 벽에는 노송과 백호가 그려져 있다. 북쪽 벽의 벽화는 도굴로 파괴되어 무엇이 그려져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청룡·백호 등의 벽화는 고구려 때부터 많이 그려져 왔으나 왕대와 매화·노송이 그려진 것은 특이한 예이다.

석실 안에는 커다란 판석으로 된 판대가 놓여 있고, ‘국화무늬박이 청자잔’과 옥띠 고리, 놋주전자 외에 금동 장식품 몇 점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무덤 내부가 호사스럽게 치장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봉분 둘레에는 12각으로 호석(護石)을 세우고 그 사이에 난간석을 얹었는데, 호석은 1993년 재건 당시 화강암으로 다시 새겨 놓은 것이라 옛 맛을 찾아보기 어렵다.

만월대
만월대 전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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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는, 919년 이후 고려 전기간에 걸쳐 왕궁이 자리 잡았던 유적이다. 원래 이 궁궐 안에 "망월대"라 불리던 궁전이 있어 어느 때부터인가 궁궐 전체를 만월대라 부르게 되었다.

만월대의 특징은 축대를 높이 쌓고, 그 위 경사면에 건물을 계단식으로 배치하여 층층이 배열된 지붕으로 인해 그 규모가 웅장해 보인다는 점이다. 왕궁에는 황성의 정문인 동쪽의 광화문과 궁성의 정문인 남쪽의 승평문(昇平門), 그 뒤에 연이어 세운 신봉문, 창합문 등 13개의 문이 있었다. 정면 7칸(27.4m), 측면 4칸(11.12m)으로 된 신봉문터에는 지금도 3개의 문길을 가진 2층 문루의 장엄했을 옛 모습을 상상케 하는 주춧돌이 남아 있다.

만월대의 중심 축대 위에는 회경전, 장화전, 원덕전과 그 밖의 건물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맨 앞 회경전의 축대 정면에는 높이 7.8m의 커다란 돌계단이 놓여 있다. 만월대의 기본 정전인 회경전터는 동서 약 60m, 남북 약 100m의 네모난 회랑으로 둘러져 있다. 정면 9칸(39.35m), 측면 4칸(16.86m)으로 된 회경전 본전터의 기단 평면은 고구려시대 이래 이어져 온 전통형식이다.

회경전 뒤의 장화전, 원덕전도 각각 회랑에 둘러싸인 웅장한 궁전들이었다. 만월대 중심 축대 동쪽에는 동궁터, 서쪽에는 건덕전터, 침전터 등 수많은 건물터들이 있고, 만월대 뒤 언덕에는 정자터 들이 남아 있다. 황성의 성벽은 후삼국 때 태봉국이 쌓았던 발어참성 성벽을 거의 그대로 이용하였고, 그 안을 따로 막아 궁성 성벽으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기상관측소인 개성 첨성대는 여기 황정 서쪽 구역에 자리 잡고 있다.

1361년 모두 불탄 후에 폐허로 남아 있는 만월대터에서는 기와, 벽돌, 치미, 괴면, 기둥밑장식 등 적지 않은 유물들이 나왔다.

고려성균관
고려성균관 전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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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시 방직동에 위치한 개성 성균관은 고려시대 국가 최고 교육기관으로 현재는 고려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고려 성종 11년(992년) 국자감으로 시작된 이곳은 국자학, 대학, 4문학과 율학, 서학, 산학 등 6개 학과를 두어 국가 관리양성 및 유교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 국자감은 충렬왕24년(1298) 성균감으로 되었다가 같은 왕 34년(1308) 성균관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조선 태조 5년(1396) 한양에 성균관이 세우지면서 개성 성균관은 지방향교(鄕校)로 되었다가, 이후 1592년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35년(1602)부터 8년간에 걸쳐 같은 위치에 복원하였다.

고려 성균관 건물들은 고려시대 국가교육기관의 면모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당시 최고 교육기관의 건축양식과 교육 제도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전체 대지는 경사져 있으며, 건물들은 남북 중심축을 기준으로 대칭으로 배치되고, 검약과 소박을 표방하는 유교 윤리에 맞게 엄격하게 꾸며져 있다. 약 1만㎡의 넓은 부지에 크게 4개의 영역으로 구분되고, 18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개성 성균관의 배치는 서울 성균관과 그 배치가 다른데, 명륜당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講學)구역이 앞쪽에 있고,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배향(配享)구역을 뒤쪽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이다. 바깥 삼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좌우에 향실(동쪽)과 존경각(서쪽)이 위치하고 있다. 명륜당 앞뜰 좌우에는 학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명륜당 뒤편 내삼문을 지나면 정면에 공자를 제사 지내던 대성전이, 그 앞뜰 좌우에 이름난 유학자들을 제사 지내던 동무와 서무가 자리하고 있다. 이외에도 계성사와 10여 채의 부속건물들이 더 있다.

공민왕릉
공민왕릉 전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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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국보 123호이다. 2기의 무덤을 동서로 나란히 세운 쌍릉 형식으로, 공민왕의 무덤인 현릉(서쪽)과 왕비 노국공주의 무덤 정릉(동쪽)으로 이루어졌다. 공민왕은 1365년 왕비가 죽자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감독하여 9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이 방대한 무덤 공사를 벌였다. 공민왕릉은 고려왕릉 가운데 가장 보존상태가 좋으며 고려시대 왕릉 제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이후 조선시대로 이어져 왕릉제도의 모범이 된 능이다. 능은 개성시 서쪽 교외에 있는 봉명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무선봉의 산중턱에 남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묘역은 가로로 긴 직사각형의 3개의 층단과 맨 아래의 경사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위에 있는 제1단의 크기는 가로 40m, 세로 24m이며 여기에 현릉과 정릉이 자리 잡고 있다. 봉분은 지름이 13m, 높이 6.5m이며, 화강암 호석을 둘렀다. 면석(面石)에는 조선시대로 연결되는 타래무늬(渦文)속에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호석 밖으로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그 밖으로 석호(石虎) 4구, 석양(石羊) 2구가 있다. 다른 능과 다른 점은 능 앞 제1단과 제2단 사이에 각각 돌계단이 하나씩 있고, 그 앞에 장명등(長明燈)이 하나씩 있으며, 그 좌우에 문인석이 2쌍 서 있다. 제3단으로 내려서면 무인석이 2쌍 서 있다. 현릉의 내부 구조는 연도와 석실로 이루어져 있다. 연도는 현실의 남쪽 벽 중앙에 길이 9.1m, 너비 2.04m, 높이 1.82m로 만들었다. 현실은 가로 2.97m, 세로 3m. 높이는 2.2m이며 화강암 판돌로 쌓고 평천장으로 하였다. 내부 동·서·북 세 벽면과 천장에는 벽화를 그렸는데 벽면에는 12지신상을, 천장에는 북두칠성·삼태성·해를 그렸다. 1905년 이후 여러 차례 도굴되어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남대문
남대문 전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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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직할시 북안동(北安洞)에 있는 문루이다. 북한 국보급 제34호이며, 개성 내성의 정남문으로서, 1391년(고려 공양왕 3) 착공하여 1393년(조선 태조 2) 준공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크게 파괴되었으나 1954년에 복구하였다.

전체적인 모습은 직사각형의 화강암 축대 위에 단층 문루를 세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문루는 정면 3칸(길이 13.63m), 측면 2칸(길이 7.96m)의 겹처마 팔작지붕에 3포(包)집의 구조를 하고 있다. 축대 한가운데에는 무지개문(虹霓門)을 냈다. 문루의 기둥은 모를 죽인 1m 높이의 4각 돌기둥 위에 배흘림기둥의 기법으로 나무기둥을 이어 올렸다. 문루에는 모루단청을 입혔으며, 안에는 유명한 개성 연복사종(演福寺鐘)이 걸려있다. 고려 말의 건축기법을 잘 보여주는 문화 유산이다.

선죽교
선죽교 전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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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는 개성시 선죽동에 위치한 길이 8.35m, 너비 3.36m인 다리이다. 원래 선지교(選地橋)였던 것이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이 다리에서 피살되고 그 자리에서 대나무가 피어났다고 하여 선죽교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난간이 있는 다리와 없는 다리가 있는데, 난간이 있는 다리가 선죽교이다. 이 난간은 1780년(정조 4) 정몽주의 후손들이 사람이 다니지 못하도록 설치한 것이고 난간이 없는 다리는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그 곁에 새로 놓은 것이다. 다리 옆에는 선죽교라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이는 한석봉의 글씨라 한다. 길 건너에는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가 비각 속에 있다.

전체지도

12지점 10지점 분묘 4.5 11지점 9지점 8지점 6지점 7지점 분묘3 3지점 4지점 삼국시대 전기주거지 2지점 고려시대 건물지 5지점 분묘2 분묘1 1지점